이문재|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공공미술 분야의 관계 지향성에 주목한다.’ 지난 19일 서울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 제1회 일맥아트프라이즈 시상식은 모든 것이 참신했다. 장르에서부터 심사 방식, 시상식도 남달랐다. 광범위한 자료 조사를 거쳐 세 명의 추천위원이 수상 후보자를 네 명(팀)으로 압축했다. 김월식, 박찬국, 양진우, 양철모·조지은씨가 그 주인공이었다.
상을 주관하는 재단 측에서는 지난 11~12월 네 작가의 작업 현장을 동영상에 담았다. 김월식씨의 수원시 인계동, 박찬국씨의 남양주 논과 밭, 양진우씨의 고양 창작 스튜디오, 양철모·조지은씨의 마석 이주노동자의 일터가 시상식장에서 영상으로 소개됐다. 이어 심사위원과 관객 앞에서 ‘작가와의 대화’가 진행됐다.
나는 공공미술에 대해 문외한이지만, 낯설지만은 않았다. ‘공동체’와 ‘관계’는 요즘 내 상상력의 키워드다. 동영상에 이어 작가들의 생각과 경험담을 들으면서 나의 문학과 삶의 근황을 살필 수 있었다. 물론 작가와 심사위원들이 지적했듯이 공공미술의 현 단계가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다. 일부 공공미술이 지역성과 맥락을 형성하지 못한 채 패턴화, 이벤트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네 작가의 프로젝트는 도발적이면서도 경쾌했고, 전복적이면서도 무겁지 않았다. 김월식씨는 ‘구성원 각자가 즐거운 공동체’를 지향하면서 새로운 가치를 생산하는 데 주력했다. 박찬국씨의 논밭 작업은 일상에서 출발하되, 일상을 다시 사건화하는 데 비중을 둬왔다. 양진우씨는 버려진 물건이나 공간을 리모델링하면서 관계를 성찰하는 계기를 제공했고, 양철모·조지은씨는 이주노동자들의 삶에서 흔적과 기억의 의미에 초점을 맞췄다. 심사 결과, 대상은 인계시장 프로젝트를 진행한 김월식씨에게 돌아갔다.
공공미술은 ‘작품’이 아니다. 액자에 갇힌 유일한 텍스트, 아우라를 내뿜는 작가의 ‘영혼’이 아니다. 권위적이고 일방향적인 메시지가 아니다. 공공미술은 관계와 소통, 실천과 변화를 중시하는 ‘작업’이다. 작품이 아닌 작업, 결과가 아닌 과정, 전시장이 아닌 현장을 핵심으로 하는 공공미술 앞에서 나의 시는 흔들렸다. 시와 시인 사이, 시와 현실 사이의 괴리가 암담했다.
공공성, 공적 가치와 무관한 문학은 진정한 문학일 수 없다. 문학은 ‘공공문학’이다. 하지만 요즘 발표되는 시의 대부분은 정치사회적 맥락에서 벗어나 있다. 나무와 새를 화자와 동일시하는 데 몰두하거나 ‘깨진 거울’을 들고 분열된 주체를 비추는 데 열중한다. 문학은 ‘작품’이라는 고정관념이 완강하다. 문학은 전시장에 걸리는 유화와 다르지 않다. 문학은 문학(책)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는다.
다행스럽게도 작품이 아니라 ‘작업’으로서의 문학을 열어가는 선각들이 있다.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교수와 일본의 평론가 가라타니 고진. 김 교수는 생태·환경 전문지를 펴내는 것은 물론 기고와 강연, 사회적 참여를 모두 자신의 문학이라고 규정한다. 근대문학의 종언을 외친 바 있는 가라타니 고진은 협동조합에서 미래를 찾는 한편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젊은이들에게 데모를 하라고 촉구한다. 그래야 세상이 변화한다는 것이다. 또 있다. 용산사태 직후 ‘한줄 선언’을 펼친 젊은 시인들, ‘희망버스’를 탄생시킨 송경동 시인(얼마 전 구속됐다)도 ‘공공문학’의 최전위일 것이다.
문학을 포함한 예술이 관계를 재구축하며 공공성을 회복하지 않는 한 인간과 생명, 인간과 지구가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녹색세상’은 끊임없이 유예되는 미래다. 지속가능한 녹색사회를 추구하는 한, 모든 예술은 공공예술이다. 예술이 세상을 바꾸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이 세상에 의해 바뀌지 않는 예술이다. 나는 세상에 의해 함부로 바뀌지 않는 예술이 세상을 바꿔 나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작품보다 작업이, 작업보다 작가가 더 커야 한다. 아니, 작가보다 작가의 삶이 더 커야 한다.
[경향신문]2011_12_29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12282123125&code=990000